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1970년대 유적지가 하나 있었다. 나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던 곳으로 1973년 석유파동을 겪으면서 겪은 혼란의 재발을 막기 위해 정부에서 만든 석유비축기지다. 석유 탱크 다섯 대에 서울 시미들이 한 달간 사용할 수 있는 석유를 저장할 수 있는 곳으로 지금 봐도 규모가 대단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참 세월이 흘러 이후 한일 월드컵을 치루면서 위험시설로 분류된 이후 결국 폐쇄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서울시가 문화비축기지로 이름을 바꾸어 문화 행사를 개최하는 등 활용도를 다양화했다고 한다.
최근 레코드 페어가 열린 곳이 바로 이 곳 문화비축기지다. 왜 이름이 이런지 알고 보니 석유비축기지에서 앞 글자만 바꾸여 얼린 문화 공간으로 만들며 그 이름의 유래를 그대로 남겨놓은 것. 아무튼 서울레코드 페어는 상당히 여러 번 다녀왔는데 이번 13회는 아마도 가장 크고 드넓은 공간에서 진행한 행사가 아닌가 한다. 꼭 이렇게 클 필요는 없지만 여러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는 곳에 음반 판매 부스 및 쇼케이스, 한정반 판매 부스, 휴식 및 간이 푸드 코트 등으로 꾸려 입체감을 살렸다.
사실 이번 레코드페어는 갈까 말까 망설인 게 사실이다. 이번달 음반 구매 예산을 이미 훌쩍 넘어서 버린 와중에 레코드페어에 가면 십중팔구 추가로 음반을 구입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요일 오후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나니 손이 근질근질하다. 게다가 비가 올거라는 예보는 뒤바뀌어 비는커녕 해가 뜰 기세다. 택시를 타고 레코드페어 현장으로 가서 디깅을 시작했다. 레코드페어 한정반 부스 앞에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한정반 부스는 지나쳤다. 사실 그리 끌리는 음반도 없기도 했다.
이후 T1, T2 등 주로 음반 판매 부스에서 토요일 오후의 나른한 시간을 엘피 디깅으로 밀도 높게 메꾸기 시작했다. 팝, 록, 재즈 등 주로 예전에 즐겨 듣던 장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중고도 많고 오픈도 하지 않은 재발매도 많았다. 원반도 있고 과거 국내에서 발매된 라이센스 엘피도 꽤 보였다. 꽤 많은 음반을 훑어본 듯 한데 혹시나 놓친 게 없나 다시 보곤 했다. 중간 중간 구입할까 말까 하다가 끝내 참아낸 음반도 꽤 있다. 이미 가지고 있지만 교체해주고 싶은 타이틀도 있고. 도저히 구입하지 않고 못 배길 음반들만 몇 장 주섬주섬 챙겨 계산을 끝냈지만 데리고 오지 않아 못내 아쉬운 앨범도 몇 장 기억난다.
최근 타이달 스트리밍도 끊기고 해서 주로 음반으로 음악을 들었다. 주력은 엘피지만 이 외에 CD나 SACD도 들었다. 온라인 음악 서비스의 음질 수준도 꽤 높아졌고 무엇보다 편리해 엘피는 몰라도 CD나 SACD보단 음악 서비스를 자주 사용했던 나를 조금 반성하게 된다. 오프라인에서 디깅이라는 나름의 노동을 통해 내 손에 넣은 음반은 단순히 도구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런 과정으로 음반을 통해 얻은 컨텍스트는 더 깊고 단단하게 온전히 내면화된다. 시간과 돈이 허락한다면 역시 음악은 피지컬 포맷으로 즐기는 게 더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