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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B에 바친 진심 어린 오마주

PSB Passif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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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재구성의 시대

얼마 전 대학 시절 음악 동아리를 함께 했던 친구와 선, 후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여러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요즘 신문이나 책 보는 사람 손? 하고 물어보니 열 명이 넘는 사람 중 두세 명이 전부였다. 책은 몰라도 신문 읽는 사람들이 4~50대에도 없다는 건 그리 뉴스 거리도 되지 못하는 시대다. 신문이나 잡지로 접하던 뉴스는 온라인 포털에서 읽으며, 그마저도 제목을 포함해 건너뛰며 읽는다. 가장 빠른 기사는 사실 포털 사이트도 아니고 SNS나 유튜브를 통해 가장 넓게 퍼져나간다. 모든 것이 실시간이다.

이런 환경에서 문화 콘텐츠 등 다양한 컨텍스트는 새롭게 편집되고 재구성되기 십상이다. 어디선가 보았던 것 같은 글, 기억 저편에 웅크리고 있었던 것들이 혼합되어 하나의 글이나 영상으로 만들어지곤 한다. 개인의 영역을 넘어 때론 유명 작가들의 작품들 역시 그림이나 영상, 드라마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중심에 레퍼런스라고 불리는 것들이 있어 뮤지션들이나 프로듀서, 작가나 감독도 이를 과거에서 찾아 모으고 활용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했던가? 더군다나 바야흐로 지금은 편집과 재구성의 시대다. 생각해 보면 우리 각각 개인들도 사회적으로 편집된 기록을 기반으로 구성된 아이덴티티 위에서 존재하는 객체들이다. 최근 오디오 분야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과거와 현재의 편집, 역사적 리믹스의 트렌드가 보인다. 더 이상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 것일까, 아니며 과거의 역사적 재구성을 통해 현재 브랜드의 아이덴티티와 헤리티지를 더욱 굳건히 하고 싶은 것일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그저 제작자들과 그 팬층의 자기만족에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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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로 믹스와 오디오

역사적 리믹스의 방식은 다양한 관점과 앵글을 통해 하나의 소실점으로 모아진다. 최근 하이파이 오디오에서 그것은 몇 가지 패턴을 갖는다. 하나는 단순히 과거의 어느 시점에 발표되었던 모델, 그리고 출시 후 역사적으로 해당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굳히는데 커다란 이정표가 된 모델을 재구성해 제작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아예 과거에 발매 후 현재까지 해당 브랜드를 대표하는 라인업으로 이어져온 제품의 오리지널리티를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다. 때론 레복스나 뱅앤올프슨처럼 당시 제작된 제품을 사들여 완벽에 가깝게 오버홀을 거쳐 한정판으로 재판매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문화 콘텐츠가 아닌 오디오 같은 제품에서 레트로 믹스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조금 다른 지점에 있다. 그 시대의 디자인과 브랜드의 철학이 현대의 브랜드 이미지 및 진보된 기술과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시너지다. 과거의 제품에 대한 관찰과 재해석을 통해 현재의 브랜드, 제품에 대한 인식을 확장시킨다. 현대적 시선과 기술적 맥락 위에서 재탄생한 과거의 명기는 더욱더 큰 몰입과 함께 신선한 감흥을 선사하곤 한다. 부수적으로 제작자 입장에서도 각성의 기회가 되기도 하지 않을까? 한순간이라도 정신 줄을 놓으면 퇴보하는 건 일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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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B의 상징 Passif의 재탄생

PSB는 1974년 폴 바튼(Paul Barton)이 설립 후 플로이드 툴(Floyd Toole) 박사와의 만남에서 영감을 받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캐나다 스피커 브랜드로 알려져 있다. 어렸을 적 바이올린 연주자가 꿈이었던 폴 바튼은 스피커를 통한 재생음이 왜 서로 다른지 의문을 품었다. 과연 어떤 방식으로 스피커를 만들어야 할지 장벽 앞에 서있던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 앞에 나타난 NRC의 플로이드 툴 박사는 마치 구세주와 같았을 것이 분명하다. 캐나다 국립 연구 센터 NRC에서 플로이드 툴 박사를 만난 폴 바튼은 이후 상호 협력을 기반으로 음향 과학 부문에서 R&D를 진행했고, 그 결과를 가정용 하이파이 스피커에 응용해 커다란 성과를 이뤘다. 수십만 원 대 북쉘프로 유명 평론지의 추천 기기에 오르는 등 막강한 가격 대비 성능을 인정받은 것은 바로 그런 이론과 실증을 통해서였다. 필자는 아직도 PSB의 히트작 Alpha B1을 사용하고 있다.

폴 바튼 PSB 대표 2

바로 그 PSB가 갑자기 그들의 시작을 알렸던 스피커를 역사 속에서 길어올렸다. 창창한 나이에 가정용 고성능 스피커를 만들어내기 위해 NRC까지 찾아가 플로이드 툴을 만나고, 하이파이 오디오 업체로선 드물게 연구소와 함께 심도 있는 R&D를 일구어나갔던 폴 바튼. 그 결과는 Passif였다. 당시 이 스피커는 Passif 오리지널을 거쳐 Passif II까지 출시되면서 PSB를 일약 캐나다의 신흥 다크호스로 주목받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그로부터 무려 50년이 지났다. 반세기 이후 지금 PSB는 캐나다라는 국경을 넘어 명실상부 전 세계적인 하이파이 스피커 브랜드로 우뚝 섰다.

그럼 과연 반세기 만에 부활시킨 Passif, 아니 Passif 50은 어떤 모습일까? 처음 이 스피커를 마주하면 마치 삼베로 전면 패널을 가린 어쿠스틱 리서치의 빈티지 스피커를 보는 듯하다. 전혀 신제품이라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 그러나 이 그릴 안엔 50년 전의 모습과 판이하게 다른 그들만의 최신 유닛들이 장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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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트위터는 PSB의 전매특허와 같은 1인치 티타늄 돔 트위터가 보인다. 강력한 자력의 네오디뮴 마그넷을 사용하고 있다. 한편 페이즈 플러그도 친숙하다. 고역의 원활한 확산을 돕기 위한 것으로 PSB가 오랫동안 사용해온 것이다. 더불어 트위터 플레이트 주변엔 펠트 소재를 덧붙여 놓았다. 여타 브랜드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인데, 트위터 주변에서 일어나기 쉬운 회절을 억제해 고역의 투명도 및 포커싱 성능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다.

우퍼는 두 개를 사용하고 있으며 그 구경이 서로 다르다. 하나는 6,5인치며 그 아래로 8인치 우퍼를 탑재했다. 최신 스피커라면 이 사이즈에 8인치 구경 우퍼를 사용하진 않을 테지만, 과거의 방식을 재기 넘치게 응용하고 있다. 한편 진동판 또한 요즘 우퍼 진동판과 달리 페이퍼 소재를 사용하고 있으며, 에지는 고무 소재를 사용했다. 흥미로운 건 8인치의 존재다. 알고 보니 이 유닛은 크로스오버와 연결되지 않는 일종의 패시브 라디에이터로서 6.5인치의 저역을 보조해 주는 역할로서 기능한다. 인클로저의 어느 부분을 보아도 포트가 없는 것을 보면 저음 반사형으로 설계하지 않고, 대신 8인치 우퍼로 저역 확장을 돕는 설계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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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음

Passif 50의 주파수 응답은 +/-3dB 기준 50Hz에서 20kHz에 이른다. 초저역 외에 중간 저역 언저리부터 초고역까지 재생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한편 공칭 임피던스는 8Ω이며, 최저 4Ω까지 하강한다. 감도는 87dB로, 제어가 아주 어려운 스피커는 아닐 것 같다. 크로스오버를 1.8kHz 끊고 있으며, 추천 파워 입력은 최소 30W에서 200W 정도로 가이드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번 테스트에선 간단히 올인원 네트워크 앰프 NAD M10 V2를 사용했다. D 클래스 증폭으로 100W 출력을 내주는 모델이다. 재생은 ROON을 사용해 진행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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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프얀 스티븐스 – ‘Mystery of love’

빈티지 스피커를 보는 듯한 디자인만큼이나 소릴 듣자마자 포근하다는 인상이 든다. 벽난로가 안온하게 있고, 그 앞 가까운 곳에 놓인 소파에 몸을 누워 음악을 듣는 듯한 느낌이다. 대역 밸런스가 중, 저역으로 내려와 있어 차분한 밸런스를 형성하며, 특정 대역을 강조하지 않아 자극적인 부분은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소리의 연결이 매우 자연스럽고 조화로운 스피커로서, 기존 PSB와 유사하면서도 다른 사운드 캐릭터를 가진 스피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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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룬 5 – ‘Sunday Morning’

스테레오 이미징은 매우 잘 분리되어 들린다. 보컬, 기타, 베이스, 드럼이 각 위치에 뚜렷하게 자리하면서도, 동시에 서로 잘 스며들어 어울린다. 소릿결이 따뜻하고 끝단이 동글동글해서 냉정하지 않고 친근한 스타일이다. 악기들의 동적 움직임은 차갑게 내달리거나 맺고 끊지 않고, 약간 느슨하게 편안한 뉘앙스가 독특하다. 유연하며 이완된 타입으로 시종일관 청취자를 편안하게 음악 안으로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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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 멀리건 – ’Morning Of The Carnival from Black Orpheus’

20세기 중반으로 건너가면 전설과 같은 재즈맨들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당시 재즈를 Passif 50은 제 짝을 만난 듯 분위기 만점으로 소화해낸다. 색소폰이 평소보다 달콤하게 들리면서 중고역 토널 밸런스는 진한 우수의 감정을 절절히 전해온다. 얇게 흩날리지 않고, 중역대가 포근하면서 진한 소리의 실타래처럼 풀려나온다. 조만간 어쿠스틱 사운즈에서 재발매될 LP 버전으로 다시 듣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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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진/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 마단조 Op.11’

레트로 디자인을 하고 있지만 사실 이 스피커는 엄연히 21세기 모델이다. 게다가 가장 과학적인 설계와 측정을 통해 개발, 제작하는 PSB 스피커다. 따라서 음악 장르에 따른 편식을 보이지 않는 올라운더 스피커로 볼 수 있다. 그리는 무대가 아주 크진 않으나 피아노의 해상도는 뛰어나며, 특히 다른 PSB 스피커보다 중역의 진한 음결과 중고역 사이의 쌉싸름한 회고적 토널 밸런스가 맛있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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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

최근 하이파이 오디오는 레트로, 리바이벌 열풍이다. 현재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묻는 와중에 대중들에게 자사 브랜드의 전통을 상기시키면서 존립의 근거를 설파하고 있다. 대중들은 과거의 역사적, 기술적, 또는 당시 디자인의 맥락 위에서 현재 해당 브랜드의 무게를 가늠한다. 때론 명품이라는 이름으로, 때론 트렌드과 헤리티지에 기대어 제품을 고르고 자기만족에 빠진다.

하지만 종종 이런 자기 복제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자신들이 복제해 내놓은 모델의 원전과 비교해 현재의 그들 제품에 담긴 기술과 설계 철학이 되레 누추하고 초라해 보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제품을 보고 있으면 팬들마저도 무안해지며 세월을 탓하기도 한다. PSB의 Passif 50은 고군분투하던 청년 폴 바튼의 PSB를 일약 캐나다의 떠오르는 유망주로 만든 역사적 모델의 환생이다. 그리고 그 안에 스민 기술은 최신의 PSB를 대변하고 있다. Passif 50은 PSB에 바치는 진심 어린 오마주다.​

글 : 오디오 평론가 코난

Written by 코난

코난 이장호는 하이파이 오디오를 평가하는 평론가다. <고음질 명반 가이드북 1,2>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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