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의 마인드로
독일은 누가 뭐래도 정밀 공학의 산실 같은 나라다. 스위스와 함께 유럽을 통틀어 과학, 공학 등에 있어 가장 진보한 나라 중 하나 독일은 자동차 분야만 하더라도 일반 세단부터 초고가의 자동차까지 전 세계 도로를 누비고 있다. 한편 하이엔드 오디오 분야에서도 독일의 위상은 높다. 매년 5월 1년 중 가장 큰 하이엔드 오디오 박람회가 독일 뮌헨에서 거대한 규모로 열리고 있는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젠 완성품 외에 부품 등 기저 산업에 대한 박람회 등을 통해 독일이 하이엔드 오디오의 거점, 총본산처럼 비춰지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 한정하면 독일 오디오의 입지는 그리 넓지 않다. 국내 소개되어 이름이 알려진 브랜드를 예를 들면 버메스터가 대표적이며 MBL, T+A, 오디오넷, 오디오피직 그리고 클리어오디오, 트랜스로터 정도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 미권의 수십, 수백개 브랜드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편이다. 하지만 그 내막을 살펴보면 독일 브랜드들은 하나하나가 예술품이라고 할 정도로 아름다운 디자인에 무엇보다 정밀한 설계와 수십년을 사용해도 고장이 나지 않을 것만 같은 단단한 만듦새와 내구성을 자랑한다.
최근 몇 해에 걸쳐 테스트해본 T+A 또한 그러한 독일 브랜드 중 하나로 인상이 깊다. T+A라는 이름부터 독일어로 ‘이론과 응용’이라는 의미로서 마치 학부생들이 가방에 넣고 다니며 공부할 법한 교재 이름처럼 읽힌다. 실제로 그들은 ‘우리는 사실 과학자입니다’라고 표방할 정도로 과학적 이론과 실험, 연구를 통해 실제 우리 실생활에 사용할 가정용 음향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 범위는 대개 하이엔드 레벨의 제품으로 스피커부터 앰프, 시디피, 네트워크 플레이어, DAC 등에 이르고 있다. 방대한 분야에 걸친 T+A의 연구, 설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넓고 깊다. 그들의 행보나 제작 스타일을 보면 마치 상업적인 가전 메이커가 아니라 과학자의 마인드로 접근한 감성 공학을 구현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최근 몇 년 T+A의 행보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취적이고 공격적이었다. 예를 들어 브루노 푸제이가 퓨리파이라는 브랜드로 독립한 후 처음 선보인 아이겐탁트 클래스 D 증폭 모듈의 전격 도입이었다. NAD 정도 외엔 메이저 오디오 브랜드가 아직 상륙하지 못한 최전방의 클래스 D 증폭의 세계에 난데없이 T+A가 발 빠르게 접근한 것이다. 고도의 기술과 측정, 과학적 이론을 바탕에 둔 T+A 답다는 생각을 했지만 바로 이를 적용해 완전히 새로운 라인업을 완성, 발표하는 데까지 일련의 과정은 매우 빠르고 기민했다. 그리고 결과물은 치밀하고 정밀했다.
DAC 200
그것이 바로 200 시리즈로서 구체적으로는 MP200, DAC200 그리고 A200, M200 등으로 구성된 쿼텟이 그 주인공이다. 순서대로 네트워크 플레이어, DA 컨버터, 스테레오 파워앰프, 모노블럭 파워앰프다. T+A가 파워앰프에 화제의 아이겐탁트 증폭 모듈을 탑재했다면 DAC200엔 과연 어떤 실험을 모색한 것일까? DAC 200 또한 기존 T+A가 플래그십에 쏟아부은 기술적 사양을 대거 이식 받았다. 요컨대 200 시리즈는 기본적으로 새로운 도전이면서도 동시에 실험과 트리클 다운의 각축전이 된 양상이다.
우선 DAC 200의 외관부터 살펴보다. 마치 계측기를 연상시키는 디자인 바탕에 더해 과거 하이파이 오디오의 여명기 벨 에포크 시대의 그것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듯한 모습이다. 특히 좌측에 위치한 두 개의 레벨 미터는 눈길을 확 끌어당긴다. 게다가 하단으로 죽 나열된 작은 단추 같은 버튼은 미니멀 디자인이라는 현대 디자인의 미명 아래 사라졌던 추억을 소환한다. 실제로 만져보고 조작해보면 누르는 감촉, 편의성 모두 기계적인 만족감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별도의 리모컨이 있기 때문에 직접 손으로 조작하지 않아도 그만이다.
레벨 미터는 사실 레벨 미터를 채용한 앰프들에서 그것을 출력 레벨을 표시해주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과 다르다. 보기와 달리 입력 레벨, 출력 레벨 또는 온도 레벨을 표시해주는 모드로 변화무쌍하게 활용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클럭 정밀도와 입력 신호의 왜곡율을 좌/우 레벨 미터에 표시해주는 ‘스트림 퀄리티’ 모드로 세팅해 음질 수준을 알압볼 수도 있다. 우측으로 가면 작은 디스플레이 창이 보이며 이 곳을 통해 입력 해상도 등 다양한 정보를 한 눈에 살펴볼 수도 있다. 우측의 노브는 무엇일까? 상상하는 그것이 맞다. 바로 볼륨 조정을 위한 노브로서 파워앰프 또는 액티브 스피커와 직결해 사용도 가능한 기기다.
후면으로 가면 다양한 입/출력단이 빼곡하다. 대단히 다양한 입/출력단을 통해 활용성이 높은 DAC임을 눈치챌 수 있다. 일단 입력은 USB, 광, 동축, AES/EBU 등이 풍부하게 마련되어 있으며 BNC 입력단까지 마련해놓은 모습이다. 이를 통해 24비트 고해상도 PCM 음원은 물론 USB 입력에선 최대 DSD1024 까지 처리 가능하다. 한편 흥미로운 건 아날로그 RCA 입력단을 마련해놓았다. 단순 게인 조정 정도가 아니라 제대로 설계된 프리앰프가 내장되어 있다는 의미다. 이 프리앰프는 –90dB에서 0dB까지 총 90단계에 걸쳐 1dB씩 증감이 가능하다. 출력단의 경우 클래스 A 증폭 방식에 풀 디스크리트, 좌/우 대칭 설계로 디지털 회로 외에 아날로그 출력단도 타협 없이 음질 위주로 설계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T+A DAC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PCM 신호와 DSD 신호에 대해 별도의 DA 컨버팅 과정을 거치도록 설계한 점일 것이다. 대체로 멀티 채널 DAC 칩셋을 통해 이 모든 신호를 처리하고 칩셋 내부에 설계되어 있는 필터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마치 자사 엔지니어들이 모두 처음부터 설계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론 그저 칩셋에 의존한 경우가 대다수다. T+A의 경우 상용 칩셋 네 발을 사용했다. 바로 버브라운 32비트 DAC 칩셋으로 + 및 – 신호를 별도의 칩셋으로 변환 후 아날로그 증폭하는 형태다.
한편 DSD 신호의 경우 별도의 DA 변환 회로를 구성해 아날로그 신호로 변환한다. 이미 T+A의 DSD 8 DAC 나 MP3100HV 같은 제품을 사용해본 경험이 있다면 유난히 DSD 음원 퀄리티가 빼어난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그 이유의 별도의 DSD 변환 회로를 통과하기 때문인데 T+A에선 True 1bit DSD 변환 작업을 수행하는 회로를 만들어 DAC 200에 탑재하고 있다. 제품을 케이스를 열고 내부 PCB 보드를 살펴보면 PCM 신호 처리 부문과 DSD 부문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으며 각각 좌/우 채널 변환 회로가 빼곡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외에도 PCM 신호의 경우 FIR 필터 두 개, Bezier 필터 두 개 그리고 NOS 필터 두 개 등 다양한 필터를 직접 설계해놓았다. 취향에 따라 선택 가능한데 필자의 경우 Bezier 2 필터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프리, 포스트 링잉 현상을 모두 제거했기 때문이다. DSD의 경우도 일반적으로 발견하기 힘든 기능이 발견된다. DSD 신호 처리시 일반적으로 로우 패스 필터를 사용해 신호 변조시 발생할 수 있는 초고역 노이즈를 걸러내곤 하는데 T+A의 경우도 60kHz 로우 패스 필터를 적용해놓았다. 하지만 ‘와이드 모드’를 마련해 로우 패스 필터를 통과시키지 않고 최대 120kHz까지 모두 재생할 수 있는 세팅이 가능하다.
청음
이번 테스트는 T+A MP3100HV를 네트워크 플레이어로 사용하고 동축 케이블로 DAC 200과 연결해 DA 변환은 전적으로 DAC 200에 맡기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한편 앰프는 버메스터 032 인티앰프 그리고 스피커는 윌슨 오디오 신형 Sasha V를 사용했음을 밝힌다. 참고로 MP3100HV 하나만을 소스 기기로 사용하다가 이후 DAC 200을 투입해 테스트해보면서 MP3100HV의 내장 DAC와 DAC 200의 차이도 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우선 DAC 200은 모든 대역에 걸쳐 어떤 특별한 색깔 없이 매우 정직한 재생음을 내준다. 전체 재생 대역에 걸쳐 평탄한 주파수 특성을 왜곡하는 현상이 없어 보인다. 예를 들어 최근 필자의 시스템에서도 종종 들어온 피에르 앙타이의 바흐 ‘골드베르그 변주곡’을 들어보면 클라브생, 다름 아닌 챔발로 사운드가 매우 청명하며 바로 앞에서 챔발로를 연주하고 있는 듯 생생하고 정확한 토널 밸런스를 가진다. 투명도가 상당히 높으며 날 것 그대로의 신싱함이 시청실 공간을 현장음 같은 소리로 가득 메운다.
전체 재생 대역 중 저역 쪽은 권위감이 넘쳐 강단 있는 소리로 들린다. 힘없이 뭉개지거나 불필요한 잔향을 길게 늘어뜨리지도 않는 원래 음원의 소리를 정직하게, 모범적으로 변환, 출력해줄 때 나올 수 있는 소리다. 예를 들어 도미니크 피스 아이메의 ‘Birds’ 같은 곡에서 저역으로 하강할 때 높은 저역에서 중간 저역 사이에 부풀려 재생되기 쉬운 구간에서도 강, 약 구분이 명확하면서도 단단한 재생음이 연출된다.
DAC가 시스템 안에서 하는 역할을 한 편으로 제한적이지만 한 편으론 대단히 폭넓다고 볼 수 있다. 토널 밸런스, 다이내믹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특성을 규정하는 것은 음원이 내장하고 있는 정보를 얼마나 정확히 이끌어낼 수 있느냐에 달렸다. 디지털 변조 및 필터 그리고 아날로그 출력단, 클럭 등 한 부분만 완성도가 떨어져도 다른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얀 가바렉과 힐리어드 앙상블의 ‘Officium’을 들어보면 T+A가 설계한 DAC 200의 사운드 목표를 알 수 있다. 최대한 왜곡 없이 음원에 담긴 정보를 정확한 변조를 통해 다음 단계로 넘겨주는가에 목숨을 건 DAC다.
마지막으로 이 DAC은 광폭한 다이내믹스와 사운드 스테이징을 통해 공간을 압도하는 성능이 뛰어나다. 예를 들어 티에리 피셔 지휘, 유타 심포니 연주로 말러 교향곡 1번을 들어보면 여러 악기들이 동시에 출몰하는 부분에서도 각 악기들이 엉키거나 뭉개지지 않고 선명하다. 대단히 재생하기 힘든 실황 연주 녹음으로 사실 DSD 신호를 담고 있는 SACD로 재생했을 때 가장 뛰어난 재생음을 내주는 음원이다. 그러나 DAC 200은 타이달에서 재생했음에도 상당한 레벨의 다이내믹스와 무대 장악력을 보여주었다.
총평
소스 기기에서 출력되지 않는 음을 나중에 되찾거나 만들어낼 순 없다. 요컨대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순 없다. 따라서 DAC 이후 단계에 아무리 성능이 뛰어난 앰프와 스피커를 포진시킨다고 해도 이미 소스기기에서 왜곡되고 탁해진 신호를 되돌린 순 없다. DAC 200은 뭔가 화려하거나 윤색된 소리로 황홀한 감성을 이끌어내진 않는다. 다만 매우 정교하고 우직한 설계를 통해 본래 음원의 정보를 샅샅이 꺼내 거울처럼 보여준다. 이 바탕엔 위에서 언급한 DA 변호, 아날로그 변환 등 외에 지터 제어를 위한 정밀 마스터 클럭 및 치밀한 아이솔레이션 기술 등이 도처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판단된다. T+A는 고해상도 시대의 DA 변조의 모범을 보여준 작품이다.
글 : 오디오 평론가 코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