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로부터 날아오다
덴마크 하면 언제부턴가 듀크 조던의 ‘Flight to Denmark’가 떠오른다. 혹자는 듀크 조던을 미국 뉴욕에 소재한 블루 노트 레이블 재직 당식 음반으로 떠올리기도 한다. 나 또한 그렇지만 왜인지 하얀 눈밭 위에 서 있는 듀크 조던의 사진을 커버 아트웍으로 장식한 ‘Flight to Denmark’가 준 신선한 감동은 그의 다른 모든 음반들을 새햐얗게 지워버릴 정도다. 바로 덴마크 소재 굴지의 재즈 레이블 스티플체이스에서 발매된 음반 중 하나다. 지금도 스티플체이스 앨범은 미국 재즈 뮤지션들이 유럽에서 활동했을 당시 녹음으로 많은 위안을 준다. 듀크 조던은 물론 안타깝게 유럽에서 세상을 등진 쳇 베이커의 스티플체이스 당시 녹음도 추천하고 싶다.
하이파이 오디오에서도 덴마크는 전세계적으로 선진국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유럽의 가장 큰 하이엔드 오디오 박람회는 독일에서 열리지만 알고 보면 우리에게 친숙한 메이커는 덴마크 같은 나라에서 훨씬 더 많이 발견된다. 기본적으로 스칸디나비아의 기후, 척박한 환경 안에서 그들은 가내 수공업을 발전시킬 수 밖에 없었을 듯하다. 이 덕분에 덴마크에선 탁월한 디자인을 바탕으로 하는 가구, 리빙 소품 등에서 뛰어난 제품들이 많다. 아마도 하이파이 오디오가 발전한 것도 이러한 환경적 요소를 따른 것이다.
예를 들어 뱅앤올룹슨을 비롯해 좀 더 깊게 들어가면 달리 같은 스피커 브랜드와 다인오디오가 대표적이다. 그리폰 같은 하이엔드 메이커 뿐만 아니라 스타인웨 링돌프도 덴마크에 소재하고 있다. 덴마크 오디오 산업의 배후엔 피터 링돌프 같은 거물이 존재하고 하며 그는 한 때 그리폰과 NAD를 소유하기도 했었다. 아날로그 부문에서도 전 세계를 재패하다시피한 카트리지 메이커 오토폰이 있다.
덴마크 하이파이 오디오는 단순히 완제품 브랜드 외에 그 저변에 자리한 소자 제조사들의 뿌리 위에서 성장했다. 전 세계 최고급 스피커에 투입되는 스캔스픽 드라이브 유닛 제조사 그리고 피어리스 및 비파 모두 덴마크 회사들이다. 이 즈음 되면 덴마크는 하이파이 오디오 천국이다. 여기 또 하나의 덴마크 스피커 브랜드가 있다. 바로 오디오벡터라는 브랜드로 1979년 설립되었으니 이제 40년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과연 어떤 힘이 이러한 브랜드를 지금까지 끌고 왔을까?
R8 Arrete
모든 브랜드가 그렇지만 그 브랜드의 설계 철학과 기술적 토양을 한 눈에 정확히 알아보려면 최상위 플래그십을 경험해보면 된다. 각 브랜드의 최상위 모델은 그 회사의 대표부터 엔지니어 팀이 가진 모든 역량을 말 그 대로 쏟아붓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플래그십 모델은 단순히 판매고를 올리려는 목적 전에 자사의 실력과 철학, 디자인 등 다양한 측면에서 평가 기준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종종 하이엔드 브랜드는 전 세계에 열 대도 판매될 가능성이 거의 없어보이는 모델을 플래그십으로 제작하기도 한다. 플래그십은 일종의 상징으로서 기능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오늘 덴마크를 대표하는 브랜드 중 오디오벡터의 플래그십 스피커를 만났다. 굉장히 유려한 디자인의 이 스피커 이름은 R8 Arrete. 이전엔 더 상위 모델인 R11 Arrete가 있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카다로그에서 사라졌고 R8이 최상위 모델의 권좌에 앉았다. 아름다운 나뭇결이 사랑스럽게 비추는 인클로저는 물론이고 전면 드라이브 유닛 프레임 그리고 하단의 거대한 아이솔레이션 구조물까지 정말 고급스러운 마감을 선보이고 있으며 언뜻 봐도 사치스러울만큼 멋지게 마감한 모습이다. 기본적으로 그릴을 제공하고 있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전면을 가리고 들을 자신은 없다. 더불어 후방을 보면 총 네 개의 포트를 통해 후방 에너지를 방사하고 있다. 아름다우면서 고급스럽고 한편으로는 테크니컬하며 기괴하기까지 하다.
플래그십답게 이 스피커는 인간의 가청 한계를 모두 재생한다. 저역은 22Hz, 고역은 52kHz까지 뻗어나간다. 이렇게 광대역을 재생하는 스피커를 설계한다는 건 사실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단순히 트위터, 미드 베이스 우퍼 하나로 2웨이 구성한다면 좋을 것 같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인클로저 및 드라이브 유닛 구성 그리고 저역의 공진과 인클로저의 에너지 저장 문제, 크로스오버 주파수 세팅까지 신경써야할 부분들이 상당히 많고 또한 까다로운 튜닝이 필요하다. 오디오벡터를 이를 단 하나의 인클로저 안에서 모두 구현했다. 그리고 7개의 드라이브 유닛을 투입, 4웨이 방식을 택했고 크로스오버는 100Hz, 250Hz, 3kHz 등 세 구간에서 끊었다. 공칭 임피던스는 8옴, 감도는 92.5dB로 요즘 하이엔드 스피커들 대비 평균 또는 조금 상회하는 스펙을 갖추었다.
우선 트위터는 오디오벡터가 거의 전 라인업에 걸쳐 자주 활용하는 AMT 평판 유닛을 사용했다. 오스카 헤일 박사의 발명품 중 하나로 마치 아코디언처럼 주름이 펴졌다 오므라들었다 하면서 소리를 내는 방식으로 비축에서 dB 감쇄가 적고 반사음보단 직접음이 뛰어난 트위터다. 게다가 52kHZ라는 초고역 재생은 리본과 함께 AMT 같은 평판 트위터의 최대 강점 중 하나다. 트위터 아래로는 6.5인치 미드 베이스 우퍼 세 개가 도열하고 있다. 진동판은 탄소 섬유와 아라미드 섬유에 합성 목재 수지를 샌드위치 방식으로 결합한 것으로 매우 빠른 스피드와 함께 높은 강도 등 진동판으로서 이상적인 특성을 가진다. 더불어 보이스코일은 티타늄 포일에 감아 만들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드라이브 유닛이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점이다. 스피커의 후면과 바닥 등 여러 면에 또다른 유닛을 숨겨놓았다. 우선 후면을 보면 후면 포트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전면 상단 미드 베이스 우퍼 정도 높이에 4인치 미드레인지 유닛이 숨어 있다. 이 유닛은 폴리프로필렌 멤브레인을 가진 유닛으로 일종의 앰비언스 향상을 위한 특별한 설계다. 과거 플래그십 R11에서 처음 시도했던 것으로 사실 윌슨오디오 등 여러 하이엔드 스피커에서 가끔 볼 수 있는 방식인데 녹음 공간의 앰비언스를 더욱 사실적으로 재생해내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오디오벡터는 R8 Arrete에 초저역까지 깊고 풍부하게 하강하는 저역을 심어내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바로 아이소베릭 우퍼 시스템을 설계해놓았다. 그 위치는 전면도 후면도 아닌 바닥면이다. 결과적으로 하단 아이솔레이션 구조가 왜 그리 높고 복잡해보이는지 이해가 간다. 여기에 총 두 개의 우퍼가 숨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동일한 사이즈의 우퍼를 사용하는 아이소베릭 시스템과 달리 6인치와 8인치의 조합이다. 국내 내한한 오디오벡터 대표 매즈 클리포드의 말의 빌리자면 6인치 우퍼가 8인치 우퍼에 가속을 주어 더욱 빠르고 효율적이며 깊고 정확한 저역을 재생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한다.
청음
이번 청음은 청담동 소리샵의 제 1 청음실에서 진행되었다. 워낙 대형기이기 때문에 전용 공간이 아니며 제대로 된 소리의 척도를 삼기 힘든 스피커다. 하지만 이전에도 경험해본 적이 있어 어느 정도 기준점을 가지고 테스트에 임할 수 있었다. 참고로 이번 테스트엔 소스 기기로 T+A의 MP3100HV를 사용했고 프리앰프는 버메스터 077, 파워앰프 역시 버메스터의 218 파워앰프를 사용했다.
찰리 헤이든 & 팻 메시니 / Spiritual
본래 이 조합으로 윌슨 베네시 테스트를 몇 차례 테스했었다. 참고로 이전 테스트는 2018년 12월로 거의 정확히 5년 전임을 감안했을 때 소리는 상당히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감지되었다. 아마도 매칭 컴포넌트의 변화가 가장 컸을 것이다. 그 당시엔 네임오디오 NAP500DR과 500PS 그리고 네임오디오 NDX2 같은 제품들로 처음했개 때문이다. 오디오벡터는 이번 매칭에서도 충분히 풍성한 스케일과 역동감 그리고 탄력적인 중저역 기반의 추진력 넘치는 사운드를 토해냈다. 특히 저역이 낮고 느리게 꿈틀거리는 구간에서도 조용하면서도 자연스럽고 힘 있는 모습이다.
찬탈 챔버랜드 / Temptation
대형기의 풍모가 무대 전면에 넘실댄다. 더블 베이스와 기타가 거의 실사이즈에 가까운 크기로 그려지며 보컬 또한 크고 풍부한 잔향을 기반으로 둥글게 눈앞에서 노래한다. 장신의 스피커에서 종종 불편할 수 있는 시간축 일그러짐 현상 없이 매끄러운 리듬감을 선보여 흥을 돋운다. 이 스피커는 드라이브 유닛에 최대한 힘을 빼고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는 자유를 부여했다. AMT 트위터의 후방도 활짝 열어놓고 각 유닛에 긴 여러 슬롯형 포트를 만들어 충분히 숨쉴 수 있는 여유를 준 결과가 아닐까 추측된다.
막스 리히터 / Spring 1
대체로 대형기의 핵심 중 하나는 저역 해상도와 스피드다. 이 스피커는 현장 녹음 같은 앰비언스 표현도 훌륭하지만 음색 부분도 돋보인다. 풍부한 홀 톤, 앰비언스가 넘실 넘실 꿈을 꾸듯 청취자를 그 공간에 이동시킨다. 물론 AMT의 힘을 무시할 수 없으나 정확히 말하면 트위터와 미드의 절묘한 밸런스에서 연유한다. 더불어 예상 외로 부밍 현상은 포착되지 않는다. 마치 광대역으로 확장시킨 풀레인지 유닛의 소리를 듣는 듯한 비현실적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반 피셔 /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4악장
대편성에서 오디오벡터 이 스피커에 대해 요구한 사운드스케이프가 좀 더 구체적으로 펼쳐진다. 첫 번째 단서는 각 악기의 위치와 그 조화다. 마치 칼처럼 잘라낸 인위적인 포커싱이 아니다. 대신 물밀듯 파도처럼 몰아치는 현악 파트는 현란하면서도 자극 없이 무대 전편을 구석구석 수놓는다. 한편 관악 파트는 그 표면의 금빛이 찬란하게 빛나는 듯 눈부시다. 기본적으로 매우 넓은 공간에 걸쳐 편안하면서도 높은 정보를 내뿜으며 면도날 같은 예리함보단 전체를 모두 아우르는 거대한 다이내믹스가 일품이다.
총평
오디오벡터 R8 Arrete의 스튜디오 촬영 컷을 몇 개 살펴보다가 흥미로운 사진을 발견했다. 다름 아니라 스피커 옆 바닥에 놓인 조그만 파워앰프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디자인이어서 멈칫했는데 이내 기억에서 끌어올렸다. 나의 기억이 맞다면 에어타이트의 EL34 파워앰프인 ATM-1S다. 드보어 피델리티의 Orangutan O/96과 좋은 소리를 내줄 듯한 스피커로 점찍어보았던 앰프다. 출력은 채널당 35와트. 아마도 오디오벡터는 이러한 소출력 진공관 앰프로도 드라이빙 가능한 대형 풀레인지급 스피커를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내가 운용하는 패스랩스 XA60.5 모노블럭과 매칭해보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 정도 크기의 스피커에서 누구나 바라는 것은 커다란 사운드 스테이징과 다이내믹스 거대한 무대와 함께 정밀한 포커싱 등이다. 그러나 콘서트홀에서 듣는 음악보다 오히려 더 정밀하고 타이트하며 인위적인 경우도 많다. 어떻게 하면 현장의 음악적 감동을 가정으로 옮겨놓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면 R8 Arrete는 좋은 해답이 될 수 있다. 우리가 평소 듣는 규모의 스피커에서는 절대 표현될 수 없는 종류의 소리가 이 스피커에 있다. 그것은 누구나 꿈꾸는 연주회 현장의 소리에 다름 아니다.
글 : 오디오 평론가 코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