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류 증폭과 멀티 EQ 커브의 정수
사라진 버튼
모든 음악 신호의 출발점은 소스 기기다. 릴 데크부터 카세트 데크, 턴테이블, DAT, MD, CD 등에 이르기까지 지금은 사라지거나 소수의 사람들만 즐기는 소스 기기들이 문득 떠올랐다. 그중 많은 기기에는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버튼과 스위치들이 존재했다. 예를 들어 카세트 데크에는 여러 EQ가 있었고 바이어스 스위치도 있었다. 노멀, 크롬, 메탈 테이프마다 특성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돌비 ON/OFF 스위치, MPX 필터, 피치 컨트롤 등 무척 다양한 기능들이 버튼과 스위치 형태로 구현되어 있었다.

소스 기기뿐만이 아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포맷의 양식이 바뀌고 각 포맷이 가진 고유한 특성 때문에 그 당시에만 하드웨어에 존재했던 스위치들이 있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모노/스테레오 전환 스위치를 자주 볼 수 있었다. 고역과 저역을 조정하는 트레블, 베이스 컨트롤 노브도 필수처럼 달려 있었다. 저음량에서 Fletcher-Munson 곡선을 보상해 고역과 저역을 강조해주는 버튼도 있었다. 테이프가 많이 사용되던 당시에는 테이프 모니터 스위치가 따로 있었다. 녹음과 모니터링을 위한 것이었다. 지금도 숨죽이면서 테이프에 녹음하던 유년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중 포노 관련 버튼, 노브, 토글 스위치도 기억난다. 사실 포노단은 과거 앰프, FM 리시버, 프리앰프에 필수 요소였다. CD가 1982년 디지털 녹음의 피지컬 포맷으로 발표된 이후에도 LP는 꽤 오랜 시간 대중들 사이에서 사라지지 않았기에 하드웨어에서도 관련 기능들이 포함되어 나왔다. 프리앰프의 성능 지표 중 하나는 포노단의 소리에 있었다. 그만큼 과거에 출시되었던 프리앰프들의 내장 포노앰프는 지금 들어도 좋다. 단, 상태가 훌륭하다는 전제하에. 스펙트랄, 마크 레빈슨, 크렐, 클라인 등 셀 수도 없이 많다.

더 오래된 빈티지 리시버나 프리앰프에서 발견되는 포노단도 진국인 경우가 많았다. 위에서 말한 버튼, 스위치, 노브 외에도 여러 조정 기능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모노/스테레오 전환이나 포노 선택 스위치는 물론, 입력 로딩 조정 스위치, 서브소닉 필터도 있었다. 지금도 프리앰프의 명기로 칭송받는 마란츠 7C을 보면 RIAA 표준 커브를 중심으로 78rpm 쉘락 레코드를 위한 Old 78, 컬럼비아 커브를 위한 커브 선택 기능이 존재했다. 이 외에도 저역과 고역 필터를 따로 두는 등 온통 LP에 기록된 녹음의 정확한 재생을 위해 최선을 다한 모습이었다.

부활한 버튼
이 중 다른 많은 기능은 사라진 상황에서 FM 어쿠스틱스가 FM122, FM223 같은 포노앰프를 통해 RIAA 외에 다양한 EQ 커브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CD가 유행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LP를 아날로그 포맷으로서 고유한 위치를 지키고 있었고, 오디오파일들은 오래된 명반들을 제대로 듣고 싶어 한다는 점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오디오 리서치, 토레스, 도시오디오 등 여러 메이커들이 멀티 EQ 커브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라함 슬리를 비롯해 최근에는 골드 노트 등 다양한 포노앰프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멀티 EQ 커브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부활한 버튼과 스위치는 마치 LP의 부활을 보는 듯했다.

바쿤 EQA-5640 MK4
필자가 최근 가장 많이 사용해본 멀티 EQ 커브 대응 포노앰프는 바쿤 제품일 것이다. 고가의 제품들은 사용자도 거의 없을뿐더러 대여도 쉽지 않다. 정말 극소수의 마니아들만 즐기는 모노 시대 LP에 국한된 욕구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LP의 역사는 대단히 길었고, 그중 모노 LP의 수명도 매우 길게 이어졌다. 스테레오 LP가 자리 잡은 것은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였다. 뿐만 아니라 1970년대가 되어서야 모노와 스테레오 병행 발매가 거의 끝났다고 하니 모노의 생명력은 대단히 끈질겼다고 볼 수 있다.
최근 듣고 있는 바쿤 EQA-5640 MK4는 바로 스테레오 시대가 시작되기 전 모노 녹음 시대의 LP까지 모두 대응하는 포노앰프다. 우선 전면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단서들이 있다. 우측에 RIAA 표준 외에 NAB, 컬럼비아, FFRR, AES, RCA 등 다양한 EQ 커브 선택이 가능한 노브를 설치해놓았다. 1954년 RIAA가 고역 롤오프와 저역 턴오버의 기준을 각각 2122Hz, 500Hz로 정한 이후에도 여러 레코드 회사에서 이를 준수하지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독자적인 커브를 사용한 레이블이 쓴 EQ 커브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한편 게인 조정 노브도 눈에 띈다. Low 2, Low 1, Mid 2, Mid 1, High 2, High 1 등 여섯 가지 게인을 지원하고 있다. 노브를 시계 방향으로 돌릴수록 증폭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청감상 볼륨도 함께 올라간다. MM 카트리지를 사용할 경우 30dB에서 46dB, MC 모드로 사용할 경우 최소 48dB에서 최대 66dB까지 다양하다. MM이나 MC 모두 일반적인 포노앰프에 비하면 약간 낮은 게인값을 나타내며, 게인값이 정수 단위로 딱 떨어지지 않는 것은 전류 증폭 회로인 SATRI 회로 설계의 고유 특성 때문이다. 어쨌든 청감상 볼륨에 의지해 적당한 게인을 찾으면 된다.

바쿤이 포노 EQ를 만드는 법
잠시 바쿤 EQA-5640 MK4의 설계에 대해 짚어보자. 포노앰프의 설계는 거기서 거기라는 선입견이 있지만 사실 포노앰프마다 제각각이다. 그리고 바쿤의 포노앰프는 그중에서도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일단 바쿤 포노앰프의 핵심 특징은 무귀환(Non-NFB) 설계에 있다. SATRI 회로는 기본적으로 네거티브 피드백을 최소화하거나 없애 왜곡이 낮고, 미세 뉘앙스·공간감·투명도가 뛰어날 수밖에 없다.
바쿤 설계의 진짜 시그니처는 전류 증폭(Current Mode) 기반이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포노앰프가 전압 입력/증폭 방식을 쓰는 데 비해 바쿤은 카트리지에서 나오는 전류 신호를 직접 입력으로 받아 증폭한다. 따라서 MC 카트리지는 전류 출력이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에 노이즈가 적고 S/N비가 극대화된다. MM은 전압 입력 모드로, MC는 전류 입력 모드로 자동 전환되며 입력단에서 별도 단계 없이 최적화된 증폭 단계를 밟는다.

EQA-5640 MK4에는 신형 SATRI-IC 회로를 탑재했다. 다름 아닌 HBK(I) (Hibiki) IC, 일명 ‘히비키’ 회로로 불리는 최신 버전으로 이전보다 저노이즈 특성이 크게 강화되었다. 더불어 HBFBC(High Bandwidth Floating Balanced Current) 회로를 사용했다. 이는 밸런스드 전류 증폭으로 S/N 향상과 왜곡 억제 등 다양한 이점을 제공한다. 이 IC들은 디스크리트 트랜지스터 70개 이상을 집적한 형태로, 전통 오피앰프보다 훨씬 복잡한 전류 처리가 가능하다. 내부 회로가 복잡하고 여러 부품이 사용되는 이유다.
MK4 버전에서는 이전 버전 대비 전원부와 기판 설계에서 업그레이드가 있었다. 우선 전원부를 완전히 분리한 대형 PCB가 눈에 띈다. MK3까지는 메인 기판과 전원부가 동일 기판이었으나 MK4부터 전원 전용 대형 PCB로 분리해 전원 간섭 노이즈를 최소화하고 전원 임피던스를 낮췄다. 이 외에도 고품질 정류/필터링 회로를 구성했다. 트랜스포머 업그레이드는 기본이며, 대용량 콘덴서와 션트 레귤레이터 등으로 더욱 정확하고 안정적인 전원 공급을 꾀하고 있다. EL 반도체 콘덴서 등 고급 부품을 사용하는 섬세한 튜닝도 돋보인다.

EQA-5640 MK4는 단순히 RIAA 기준으로 커팅된 대중적인 LP를 적당히 즐기기 위해 만든 포노앰프가 아니다. MM은 물론 특히 MC 카트리지로 LP에 기록된 정보를 매우 정확하고 섬세하게 증폭하는 포노앰프다. 게인 조정을 통해 대단히 다양한 카트리지에 대응하며, 전류 증폭 방식이기에 별도의 로딩 임피던스 조정이 필요 없다. 무귀환에 SATRI 회로로 무결점의 순수한 증폭을 목표로 했으며, 동시에 다양한 EQ 커브를 마련해놓아 진지한 LP 애호가에게 강하게 어필하고 있다.
글, 사진 : 오디오 평론가 코난
제품 사양
- 입력: 1개 (MM/MC 카트리지 스위치로 전환)
- 출력: 전압 출력 1, SATRI-LINK 출력 1 (동시 출력 가능)
- EQ 커브: RIAA, NAB, COLUMBIA, FFRR, AES, RCA
- 게인: HIGH1, HIGH2, MID1, MID2, LOW1, LOW2
- 주파수 특성: 20Hz ~ 50kHz
- 최대 출력: 8V (1% 왜곡)
- 왜율 (1kHz, 4V): 0.06%
- S/N 비: -135dB (HIGH1)
- EQ 오차: ±0.3dB
- 사용 전압: AC 220V
- 크기: 70mm(H) × 236mm(W) × 293mm(D)
제조사: 바쿤 프로덕츠 (일본)
공식 수입원: 바쿤 매니아 (https://cafe.naver.com/bakoonmania)
공식 소비자 가격: 3,960,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