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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히 떠오른 고해상도, 바쿤이 옳았다

바쿤 DAC-9740

bakoon dac9740 thumb

여백

시간이 날 때면 전시나 공연을 다닌다. 코로나 이후 참고 참았던 야외 활동 중에 가장 참기 힘들었던 것이 아마도 이런 문화 예술 관련 행사였을 테다. 올해는 다행히 여러 공연과 전시를 다녔는데 그 중 기억에 남는 공연이라면 얼마 전 롯데 콘서트홀에서 열린 슈타츠카펠레의 브람스 교향곡 연주였다. 바렌보임이 오지 못해 아쉽긴 했지만 근심을 뒤로 하고 대신 지휘봉을 잡은 크리스티안 틸레만은 천의무봉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하나 더 기억나는 것은 아무래도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열린 ‘어느 수집가의 초대’(A Collector’s Invitation)였다. 고 이건희 회장의 개인 컬렉션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한 이 전시는 수많은 인파를 박물관으로 모이게 했다. 특히 박물관이라는 공간에선 보기 힘든, 매우 다양한 그림들이 시선을 끌었다. 한 분야만을 집중적으로 컬렉션하기보다는 도예, 조각, 회화 등 다양한 분야에 알토란같은 작품들이 빼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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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정선의 ‘인왕제색도’가 아니었을까? 책에서만 볼 수 있었던 이 그림이 여러 서양화 사이에서 유독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다른 서양화가의 작품들은 빛과 그 빛으로 인해 비추어내는 형형색색의 빛깔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저 검은 묵으로 그린 인왕제색도가 더 빛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묵직한 선과 붓의 힘은 농묵의 강직한 무게감으로 드러나 있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산을 휘감고 있는 안개가 여백으로 치환되었음에도 그 여백은 봉우리를 가볍게 떠받치고 있는 듯 신비로웠다.

빛과 그림자를 통해 실체를 사실적으로 표현했던 당시 서양화와 달리 동양화는 조금 다른 견지에서 실체를 해석했다. 소실점을 중심으로 현실의 시선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시선을 여러 개로 나누어 산과 집이 서로 다른 입체로 만난다. 산 정상 쪽은 마치 아래에서 쳐다보는 듯하고 산 아래 부분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의 불일치. 그리고 그 사이 사이 안개는 눈앞의 실체를 꿈같은 상상의 공간으로 전이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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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쿤의 여백

바쿤 오디오에서 항상 느꼈던 것은 바로 인왕제색도에서 느꼈던 여백의 힘이었다. 서양화가 빼곡히 공간을 물감으로 채워 넣는 것과 달리 여백으로 되레 사물과 경치를 표현하듯 바쿤의 소리엔 여백이 소리를 더욱 더 또렷하게 부각시켜주었다. 그 텅 빈 공간의 안개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봉우리를 가뿐히 떠받쳐 보다 선명한 정취를 보여주었듯 새하얀 무색무취의 음향의 공허는 소리 입자를 귀에 맑게 스며들게 만들었다.

그것은 아마도 바쿤 설립자와 엔지니어들이 깨달은 바가 있어서일까? 실제로 바쿤의 대표 나가이 씨는 바쿤을 설립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제품을 소개하면서 깨달음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앰프를 시연하던 중 참석자 한 명이 ‘그것은 깨달음이야!’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실제 바쿤의 독보적인 회로 중 하나로 유명한 ‘사트리(Satri)’는 ‘깨달음’이라는 의미의 ‘사토리(さとり’에서 연유했다는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록 밴드 플라워 트래블링 밴드의 1집 그리고 어쿠스틱 젠의 스피커 케이블이 나의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것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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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트리 회로는 마치 서양 회화와 동양 회화의 차이처럼 같은 현실의 반영에 대한 다른 해석처럼 보인다. 오염되거나 훼손, 왜곡되지 않은 순수한 소리를 그대로 증폭해내기 위해 피드백 회로를 쓰지 않고 다이렉트 커플링 방식을 구현하는 서양 오디오 메이커처럼 바쿤도 동일한 목표를 향했다. 하지만 그 방법론에 있어 바쿤은 네거티브 피드백을 없애기 위해 독보적인 사트리 회로를 고안했다. 사트리 서킷의 핵심은 입력 신호를 전압 증폭하는 것이 아니라 전류 형태로 전송, 증폭하는 데 있다. 과거 크렐이 이런 전류 증폭을 위해 고안해낸 캐스트(Cast) 회로가 생각나긴 하지만 이 또한 세부적인 방법론은 물론 그 음질 경향에서도 서양과 동양의 그것처럼 다르다. 바쿤에선 다름 아닌 여백이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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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C-9740

이번에 시청한 바쿤의 DAC-9740에서도 어김없이 이러한 여백의 존재 위에 음악을 한없이 자유롭고 싱싱하게 피어올랐다. 사트리 회로는 비단 앰프 라인업뿐만 아니라 DAC의 아날로그 출력단에도 고스란히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내부를 보면 각 입력단 및 출력단에 여러 부품이 정갈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더불어 커다란 트랜스포머와 정류단 및 USB 입력단 등이 거리를 두고 격리되어 있어 신호 간섭을 가까스로 피하고 있는 모습. 내부 기판 및 부품 실장, 연결 스타일 등도 일반적인 해외 메이커와 조금은 다른 풍경을 연출한다. 마치 노구의 장인이 한 땀 한 땀 수공으로 직조한 듯한 정성이 가득하다.

DAC-9740은 일반적이 풀 사이즈 제품보다 작은 크기로 만들어졌다. 좌/우 너비가 235mm, 높이가 75mm, 깊이가 295mm로 딱 중간 정도 사이즈다. 박스에서 꺼내 나의 오디오랙 위에 올려놓으니 바로 눈에 띌 만큼 독특한 디자인에 오렌지 색깔의 셀렉터가 눈에 쏙 들어온다. 이 노브는 USB, 동축, 광 등 디지털 입력 중 선택할 수 있게 해준다. 요즘 흔한 디지털 볼륨은 생략했으며 중앙에 앙증맞은 디스플레이가 자리하고 있다. 맨 우측으로는 마치 빈티지 기기를 연상케 하는 토글 스위치가 전원 On/Off 용도로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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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면으로 시선을 옮기면 다양한 입/출력단이 늘어서서 이 제품의 용도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우선 입력은 B 타입 USB 외에 SPDIF 동축 두 조, 광 입력 두 조 등 넉넉하게 마련해놓았다. 입력 샘플링 주파수는 44.1kHz에서 최대 192kHz까지 대응하며 비트레이트는 24비트까지 지원한다. DSD를 지원하지 않는 것은 조금 아쉽다. 내부에 장착한 DAC 칩셋의 경우 버브라운 PCM 1796으로 꽤 오래 장수하고 있는 칩셋이다. 다이내믹레인지가 123dB, THD+N, 즉 전 고조파 왜곡률이 0.0005%에 달하는 고품질 DAC라고 할 수 있다.

출력의 경우 스테레오 RCA 출력 한 조 그리고 특이하게 BNC 규격의 출력 한 조를 마련해놓았다. BNC 출력의 경우 같은 바쿤 제품끼리 연결시 이른바 사트리-링크(Satri-Link)를 위한 것인데 만일 바쿤 제품을 사용 중이라면 이 단자로 서로 연결, 음질적으로 시너지를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참고로 사트리-링크 사용시 XLR처럼 장거리 전송에 유리하다. 물론 사트리-링크에 꼭 맞는 규격으로 BNC 단말 처리된 케이블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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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음

이번 테스트는 자택에서 진행했다. 총 세 개의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메인 시스템에서 그 특성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테스트엔 MSB Analog DAC 및 코드 SPM1400E 모노 블럭 파워앰프 그리고 락포트 Atria 스피커 등을 활용했다. 음원 트랜스포트로는 웨이버사 Wcore/Wstreamer 콤비를 사용해 대부분 NAS 라이브러리에 저장된 음원을 재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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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컬이나 피아노 소나타 등 단일 악기 재생에서부터 DAC-9740은 자신의 독자적인 음향적 특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예를 들어 니어 이스트 쿼텟의 ‘갈까부다’(24/88.2, flac)를 재생하자 악기의 모습이 선연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공간을 자연스럽게 에워싼다. 당시 이태원의 스트라디움 녹음 공간을 그대로 축약해 나의 리스닝 룸으로 이동해놓은 듯하다. 특히 소리와 소리 사이 여백에서 적막이 뚫고 지나간 후 서늘한 여운을 남기고 사라진다. 사트리 회로가 갖는 특성은 여지없다. 마치 고요한 산사에 템플 스테이를 하고 있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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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촉감이 손에 만져질 듯 생동감이 높은 소리여서 에이징 이전부터도 나의 뇌리에 깊게 새겨지는 소리였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더 기음이 또렷해지며 스타카토, 포르티시모 등 강력한 음표에서 더 분명한 컨트라스트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앨리스 사라 오트가 연주한 쇼팽의 ‘12 Etudes’ 중 ‘No.12 in C Minor’(16/44.1, flac)를 들어보면 폭풍처럼 몰아치다가도 마치 태풍의 눈에 들어선 듯 사뭇 조용해지길 반복한다. 너무 많은 조탁을 통해 생동감, 실체감을 잃어버리곤 하는 최근 DAC들과 가는 길이 매우 다르다. 있는 그대로 날 것의 순도를 표출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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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많이 들었던 음악 중 하나는 HDtracks의 2020년 샘플러 수록곡들이었다. 특히 쳇 베이커의 ‘Solar’(24/96, flac)을 들어보면 브러시 문지르는 소리마저 음악적으로 들릴 만큼 생생한 소리를 들려준다. 전체적인 음조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지만 약간의 색조가 깃들어 있어 심심하지 않다. 특히 하모닉스 구조가 가장 복잡한 관악기의 표현에 있어 어떤 인공적인 조작 없이 자연스러운 사운드 표현에선 말 그대로 ‘오가닉(Organic)’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아날로그 LP의 그것과 매우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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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쿤엔 어떤 화학적 조미료도 섞지 않은 온전한 순도 100%의 자연적인 미음이 저변을 잠식하고 있다. 예를 들어 도미닉 밀러의 ‘Silent night’(24/96, flac)을 들어보면 단일 현악기에서 이처럼 담백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정갈한 맛을 살려낸다. 이런 소리에 FPGA를 과하게 적용하면 가상현실 같은 소리가 되어버리지만 바쿤은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감칠맛을 그대로 남겨두었다. 슈베르트 ‘죽음과 소녀’를 연주한 파트리샤 코파친스카야의 바이올린에서도 이런 천연의 순수한 맛은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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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바쿤 DAC-9740을 서브시스템에서 들어보았다. 서그덴 A21 signature 인티앰프와 리바이벌오디오 Atalante 3로 꾸린 간단한 시스템이었다. 기존엔 MSB Analog DAC를 사용했는데 바쿤을 매칭하자 전혀 다른 스타일의 사운드가 펼쳐진다. 예를 들어 앨리스 사라 오트가 연주한 바흐, 쇼팽, 심지어 메가데스 ‘Dystopia’등 헤비메틀 음악까지 재생해보면 확실히 잔향 시간이 길어 풍부한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매끈하기보단 직물의 아주 미세한 촉감까지도 가감 없이 풀어헤친다. 어느새 나는 음향이 아닌 음악을 듣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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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

새 하얗고 속이 비칠 듯 얇은 화선지에 그린 수묵화 혹은 액자에 단단히 밀착시킨 두터운 캔버스에 그린 유화든 그 물리적 질감은 그대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애초에 표현하려는 대상은 동일하더라도 그 대상을 어떻게 그려내느냐는 작가의 몫이다. 디지털이든 아날로그 녹음이든 디지털 포맷으로 기록된 음향을 다시 아날로그의 세계로 불러내는 방향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이냐 아니면 그 사이에 텅 빈 공간까지 표현해내느냐가 오히려 관건이 되기도 한다. 기술적으로 그것은 THD와 SN비 등 계측 결과로 종종 표기되기도 하지만 바쿤 DAC-9740에서 표현된 음악적 표현력엔 숫자 뒤에 숨은, 뭐라 표현하기 힘든 마력을 가지고 있다. 특유의 여운이 혀끝에 감도는 내추럴 와인의 맛에 비유해도 좋을 듯하며 마치 작가 정신이 빛나는 동양화 한 점을 보는 느낌과 유사했다. 결국 바쿤이 옳았다. 고요한 배경 위에서 고해상도의 음악이 오롯이 떠올라 머리가 아닌 가슴을 적시길 반복했다.

글 : 오디오 평론가 코난

제품 사양

출력 – 스테레오 전압 출력 (RCA) 1조, SATRI-LINK (BNC) 1조
입력 – USB (B타입) x 1, SPDIF 동축 x 1, SPDIF 광 x 1

입력 해상도
샘플링 레이트- 44.1kHz, 48kHz, 88.2kHz, 96kHz, 176.4kHz, 192kHz
비트 레이트 – 16bit, 24bit

크기 – 235mm (너비) x 75mm (높이) x 295mm (깊이)
무게 – 2.7kg

제조사 : 바쿤 프로덕츠 (일본)
공식 수입원 : 바쿤 매니아 (https://cafe.naver.com/bakoonmania)
공식 소비자 가격 : 3,600,000원

Written by 코난

코난 이장호는 하이파이 오디오를 평가하는 평론가다. <고음질 명반 가이드북 1,2>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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