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난
메인 시스템으로는 대체로 트랜지스터 앰프를 사용해 현대 하이엔드 스피커를 운용하는 편이다. 대역이 넓고 사운드 스테이징이 또렷하게 맺히며 정위감이 좋은 스타일이 좋아하는 탓이다. 생각해보면 토템이나 오디오피직, 틸을 지나 매지코 등 모두 그런 경향의 소리들을 추종해왔다. 지금 사용하는 메인 스피커가 윌슨 사샤와 락포트 아트리아 등인 것도 일맥상통한다. 윌슨은 넓은 공간을 입체적인 사운드로 가득 메워주며 락포트는 그에 비하면 음장은 작지만 더 단단하고 정밀한 소리를 내며 음색 부분에서 자기 고집이 분명하다.
하지만 종종 서브 시스템이 메인 시스템보다 재미있을 때도 많아서 서브 시스템을 꾸리는 편이다. 그리고 서브 시스템은 스피커의 경우 작지만 자기 특색이 강하고 좀 더 편안하게 감상하기 좋은 걸 고르는 편이다. 따라서 진공관 앰프를 매칭해 듣기 좋은 걸 선호한다. 요컨대 메인 시스템은 고해상도, 광대역에 입체적인 음장, 서브 시스템은 음장이 작고 대역이 조금 좁더라도 음색적인 매력이 높고 특히 엘피 듣기에 좋은 시스템을 선호한다. 그러다보면 앰프는 진공관 방식, 주력 소스 기기는 턴테이블, 만일 디지털 소스기기를 추가한다면 R2R DAC이 좋다.
최근 병이 다시 도져 진공관 앰프를 하나 구입했다. 많이들 사용하며 한 시대를 풍미한 캐리 SLI-80시그니처다. 지난겨울 추위를 못 이기다가 구입해놓긴 했는데 일이 바빠서 사용도 못하고 있다가 최근 들어 듣기 시작했다. 일단 락포트 아트리아에 붙여보았는데 4옴 짜리에 87.5dB 아트리아를 제대로 제어하기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역시 진공관은 진공관이라서 중, 고역의 음결이 무척 마음에 든다. 도톰하고 열기가 있으며 뒤로 아스라이 빠지는 여음은 패스랩스 클래스 A앰프에서도 듣기 힘든 것이다.
윌슨은 같은 4옴이지만 91dB 감도 덕분에 아트리아보단 더 제어가 쉽다. 윌슨이 여러 용도로 테스트하기엔 아주 좋은 스피커란 걸 다시 한 번 느낀다. 이에 비하면 락포트는 정말 깐깐한 대신 잘 대우해주면 높은 음향적 쾌감을 준다. 반대로 윌슨은 진공관 앰프를 매칭해도 다소 텐션은 빠지지만 특유의 앰프 음색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높은 적응력을 보여준다. 두 스피커 모두 저역은 28Hz와 20Hz 등 초저역까지 하강한다. 캐리에 4옴, 8옴 전환 기능이 있어 다행이다.
이번에 영입한 캐리 SLI-80시그니처는 후기형으로 전기형과 전면 패널 디자인이 좀 다르다. 개인적으로 전기형 디자인, 즉 노브를 깍두기처럼 깎아놓은 게 좋다. 하지만 열이 꽤 많이 나는 진공관 앰프 특성상 내구성을 고려해 후기형을 운 좋게 구했다. 관은 모두 번들이다. KT88 진공관을 출력관으로 사용하며 정류관에 5U4, 드라이버/위상 반전에 6SN7, 그리고 입력 초단에 6922를 사용한다. 최근엔 초단에 12AX7 계열 쌍삼극관 사용하는데 여전히 6922도 매력적이다. 생각해보면 과거 무수히 많이 사용했던 오디오 리서치 등 진공관 프리앰프들이 6922를 사용했다.
그 당시엔 버글보이 같은 관들 정말 저렴하고 소리도 좋았는데 그 사이 진공관 값도 많이 올랐다. 진공관을 모두 구관으로 바꾸고 싶어 이베이 등을 조회해보니 비용이 꽤 들 것 같다. 누구에겐 이 80와트짜리 진공관 앰프가 그리 대단하진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예전에 진공관 앰프를 비교해보면 이 가격에 이만한 앰프도 흔치 않았다. 이 앰프로 음악을 듣고 있자니 또 스멀스멀 이에 꼭 맞는 스피커를 매칭해주고 싶다. 감도가 좀 높고 우퍼가 적어도 10인치 이상되는 플로어스탠딩이면 좋겠고 최신 하이엔드 스피커 설계보다 좀 더 회고적인 설계면 좋을 것 같다. 평론가 마이클 라보냐의 드보어 피델리티 O/96 같은 스피커가 딱인데…구할 길이 없다. 아니면 고감도의 혼 스피커도 좋을 듯 싶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