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열전

한가한 토요일 점심때쯤 약속을 하나 잡았다. 지인에게 포노앰프 하나를 분양 받으러 가기로 한 것이다. 모노 커브 조정을 다양하게 할 수 있는 포노앰프였다. 최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평소 끙끙대며 속앓이만 하다가 결단을 내리고 평소 해보고 싶었던 모노 시스템을 마련하려니 필요한 게 참 많았다. 운전을 하지 않는 나는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을 달려 지인 집에 도착했다. 개인 간 거래는 자주 하지 않지만 예전에 한창 때는 정말 전국을 누볐던 기억이 있다. 오랜만에 거래를 하러 가는 길이 정겹다.

하지만 도착하고 나서 나는 내가 가지러 간 포노앰프를 머릿속에서 까맣게 잊었다. 눈앞에 펼쳐진 오디오 시스템 때문이다. 누가 그랬던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 중 하나가 남의 시스템 구경하는 거라고. 업체에서 판매를 위해 셋업한 시스템이 아니라 한 개인의 시스템은 다르다. 특히 오랜 시간 오디오를 구축하고 운영해온 사람들, 무엇보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시스템은 개성이 넘친다. 한 사람의 음악 인생, 그리고 그에 맞게 섬세하게 선택한 기기들로 완결이 된다. 굽이굽이 돌고 돌아 완성한 시스템엔 주인장의 고민과 고난이 자연스레 묻어나기 마련이다.

이번 지인의 시스템도 그랬다. ATC SCM200 Anniversary를 사용하고 있지만 흥미로운 건 이 ATC 스피커 앞단에 조직해놓은 시스템이다. 프리앰프는 마크 레빈슨, 파워앰프는 그리폰 안틸레온이다. 그 옛날 너무 비싸서 엄두도 못냈는데 세월이 지나서도 싱싱하게 열을 방출하고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아무래도 소스 기기다.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의 오디오 시스템의 특징은 무엇보다 가장 많은 예산을 소스 기기에 투입한다는 것이다.

우선 지인은 지독한 아날로그 마니아다. 우선 닥터 페이커트 Woodpecker에 클라우디오 톤암을 장착했다. 카트리지는 고에츠 Onyx Platinum. ATC에서 곱고 따뜻한 소리가 일렁거리듯 피어오른다. 옆으로는 가라드 401이 똬리를 틀고 있다. 큰 몸체만큼이나 여유 넘치는 무게감이 일품이다. 오토폰 309 톤암에 역시 오토폰 카트리지를 장착했다. 해상도는 고에츠만 못하지만 중역에 실린 묵직한 힘이 끈적한 촉감을 더한다. 차분한 가운데 더 진하게 느껴진다. 블랙 커피 한 잔을 내려서 음미하는 듯한 느낌이다. 포노앰프는 아큐페이즈 C-37. 턴테이블, 톤암, 카트리지를 여러 개 운용하는 사람들에게 아큐페이즈 포노는 좋은 선택이다. 입력이 세 조에 밸런스 출력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턴테이블 외에도 오포 유니버설 플레이어를 빼면 아날로그 소스기기 일색이다. 좀처럼 보기 힘든 빈티지 매킨토시 튜너에 더해 옆에 너무나 반가운 기기가 하나 있다. ‘On Air’라고 쓰여진 팻말은 마치 방송국에서 바로 데려온 듯 마음을 아득히 먼 곳으로 보내버린다. 스튜더 릴 덱크 명기 A812가 여기 있었다. 본격 릴 테잎 레코더로서 프로페셔널 스튜디오, 방송국에서 사용되었던 장비다. 대략 1985년부터 1996년까지 생산되었으니 디지털 포맷이 대중화된 이후에도 콘텐츠 제작에 사용했다는 의미다. 라디오, 텔레비전, 영화, 음악 등 여러 까다로운 녹음 조건에 부합하는 모델로 좋은 평가를 받는 모델이다.

몇몇 음악을 LP와 CD, 그리고 릴 테이프로 들어보았는데 디지털에서 잊혀진 본래 아날로그 녹음의 맛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고에츠, 오토폰은 각각의 자리에서 개성 넘치는 소리를 들려주었고 릴 테이프는 확실히 넓은 다이내믹스와 정보량으로 압도했다. 이전에 몇 군데에서 들었던 그 릴 테이프의 소리가 아니라 정말 살아 있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한 릴 테이프 소리여서 놀랐다. 오디오는 소스, 그리고 소스 기기의 힘이 절반을 넘는다는 걸 이번에도 새삼 깨달았다. 다음에 다시 놀러 가면 거실에 버티고 있는 또 다른 시스템을 좀 더 집중해서 들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