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큐페이즈 본사에서 만난 첫 번째 시청실도 눈길을 끌었다. 첫 번째 시청실이라는 건 두 번째 시청실도 있다는 의미다. 약속이나 한 듯 바워스 & 윌킨스의 801D4를 사용하고 있는 모습이다. 한 회사의 레퍼런스 모니터 스피커를 보면 그 회사가 추구하는 철학이나 성격을 알 수 있다. 아큐페이즈는 수억 원대의 초하이엔드 스피커보다는 바워스 & 윌킨스를 선택했다. 가정과 스튜디오를 오가며 많은 사람들에게 모범적인 사운드라는 평가를 받는 스피커 브랜드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요즘 들어 천문학적인 가격표를 달고 나오는 하이엔드 스피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가격도 아큐페이즈의 철학과 부합하는 면이 있다.


하지만 이 곳 시청실의 오디오 시스템은 단순한 음악 감상이 목적이 아니다. 제품을 기획하고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완제품까지 개발하면서 수없이 듣고 튜닝의 기준을 세우며 수정하는 곳이다. 마치 실험실 같은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청음실을 나오면서 옆에 진열된 음반을 보고 직감했다. 테스트에 사용하는 음반들에 모두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모두 제품 테스트에 활용하는 음반들이다. 나 또한 아큐페이즈 컴필레이션을 몇 장 가지고 있는데 선곡이나 음질에 대단히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런 빼어난 선곡이 나온 이유가 있었다.

아큐페이즈(Accuphase) 본사의 기술부(Engineering Dept.)도 구경할 수 있었다. 주로 제품의 설계, 연구 및 개발(R&D), 그리고 정밀 테스트가 이루어지는 핵심 공간이다. 구체적인 업무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제품 설계 및 CAD 작업
우선 회로 설계 작업이다. 다른 모니터에서는 복잡한 전자 회로도(Schematic)를 띄워놓고 신호 흐름을 최적화하는 설계 업무가 진행 중이다. 그 다음으로는 회로를 담는 섀시, 즉 3D 기구 설계: 기술자가 모니터를 통해 앰프의 내부 구조를 3D CAD 소프트웨어로 정밀하게 설계하고 있다. 부품의 배치와 방열 구조 등을 입체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이다.


- 연구 개발 및 프로토타입 테스트
책상마다 배치된 오실로스코프(Oscilloscope)와 각종 정밀 측정 장비들을 통해, 설계한 회로가 의도한 대로 작동하는지 전기적 신호를 분석하는 정밀 측정 단계를 거친다. 한편에선 성능 검증 단계가 진행 중이다. 앰프의 내부 프레임이 노출된 상태로 측정 장비에 연결되어 있는 모습은 신제품 개발 단계에서의 성능 테스트나 기존 모델의 개선을 위한 실험 과정이다.



- 기술 자료 및 부품 관리
사무실 한편의 선반에는 수많은 파일철과 기술 서적들이 비치되어 있다. 이는 아큐페이즈의 수십 년간 축적된 설계 노하우와 과거 제품들의 기술 이력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벽면의 작은 서랍함들에는 연구에 필요한 각종 정밀 전자 부품들이 분류되어 있어, 즉각적인 실험과 대응이 가능하도록 준비되어 있다.
이곳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아큐페이즈의 브랜드 슬로건인 “기술을 통한 삶의 풍요(Enrich life through technology)”의 시작점이다. 아큐페이즈에서 가장 중요한 현장 중 하나다.

참고로 아큐페이즈(Accuphase)는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보다 제품의 완성도와 신뢰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브랜드인 만큼, 타 브랜드에 비해 모델 교체 주기가 매우 일관되고 보수적인 편이다. 일반적으로 아큐페이즈의 주요 라인업별 제품 업데이트 주기는 다음과 같다.
- 주요 카테고리별 출시 주기
아큐페이즈는 보통 4~5년을 한 주기로 보고 신제품을 출시한다. 이는 “한 번 구매하면 10년 이상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브랜드 철학이 반영된 결과다.
인티앰프는 약 4~5년을 주기로 업그레이드 제품을 출시해왔다. 예를 들어 E-480(2018) → E-4000(2022), E-380(2019) → E-3000(2024). 분리형 앰프는 약 5년이 주기다. 플래그십 라인업(예: C-3900, P-7500 등)은 기술적으로 충분한 발전이 있을 때만 움직이므로 5년 혹은 그보다 조금 더 길어지기도 한다. 디지털 소스기기도 약 4~5년이다. DAC 칩셋의 발전이나 드라이브 메커니즘의 개선에 맞춰 업데이트가 이루어진다.

- 아큐페이즈 업데이트의 특징
우선 순차적 업데이트가 특징이다. 모든 라인업을 한꺼번에 바꾸지 않고, 엔트리급부터 플래그십까지 매년 1~2개의 모델을 돌아가며 신중하게 업그레이드한다. 덕분에 브랜드 전체의 중고 가치가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잦은 마이너 체인지는 지양한다. 단순히 외형만 바꾸거나 기능만 약간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 회로(AAVA 볼륨 컨트롤의 고정밀화, S/N비 개선 등)에서 실질적인 측정치 향상이 있을 때 신모델을 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