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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한 아날로그 정찬

레가 Planar 1 턴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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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의 즐거움

음악을 듣는 행위의 핵심엔 과정의 서사가 주는 즐거움이 있다. 가볍게 동네 또는 회사 주변에서 먹는 백반이나 또는 패스트푸드는 아침이나 점심 그 찰나의 시간대에 어떻게 해서든 빨리 먹어 해치우고 일터로 돌아가야 하는 목적에 지배받는다. 과정이랄 것도 없이 그저 입으로 눈앞의 영양분을 흡수해야한다. 한편 한식 한상 차림이나 또는 뷔페는 조금씩, 자신만의 순서에 따라서 단지 영양분 흡수를 넘어 음식, 요리를 즐기게 해준다. 야만과 문명의 차이는 접시와 수저의 쓰임에 따라 갈리며 하이라이트는 에피타이저와 디저트에 있다.

과정의 즐거움이 아닌 그저 목표의 완수를 위해 전기자동차는 가장 신속하고 편안하게 인간에게 봉사한다. 하지만 어떤 이는 휘발유를 때는 자동차를 더 애착한다. 한편 자전거 또는 말을 타고 다니면 어떨까? 목적지까지 가는 데 시간은 더 걸리겠지만 아마도 더 재미는 있을게다. 그래서 승마를 스포츠로 즐기기도 하니까. 목적 중심이 아니라 엔터테인먼트로서 그것은 먹는 것을 단지 영양 섭취가 아닌 요리를 즐기며 느끼는 과정의 서사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주는 즐거움은 크되 다소 귀찮고 시간이 걸리며 때론 환경오염을 일으키기도 한다.

엘피로 음악을 즐기는 건 시간과 정성을 들여 코스요리 먹거나 말을 타는 것과 비유는 억지일까? 스트리밍으로 음원을 들으면 무엇보다 신속하고 편리하며 물리적 형체를 가진 포맷에 기록하지 않아도 되므로 환경오염 물질을 만들어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피를 빼내 먼지를 닦아내고 턴테이블에 올린 후 카트리지를 매단 톤암을 살포시 음반 위에 내려놓는 순간 약간의 잡음과 함께 음악이 흘러나올 땐 뭔가 모를 뿌듯함이 밀려온다. 목적지를 가는 데 더 빠르고 편리한 길을 돌아가는 것이 때론 더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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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가 Planar 1

이런 과정이 불편함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다가오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레가 턴테이블로 시작해도 좋을 것 같다. 아주 심플한 몸체에 가격 대비 가장 우수한 성능을 보여주는 것으로 정평이 있는 레가 톤암이 달려 있다. 게다가 세팅이 아주 수월해서 특별히 고급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어보지 않아도 누구나 고기 굽는 것 정도는 알 듯 매우 직관적인 인터페이스를 지녔다. 특히 세팅이랄 게 거의 필요 없다니 세상 편하고 볼 일이다. 중국이나 동남아보단 그래도 영국에서 제작한 것이 아무래도 신뢰가 가기도 한다.

Planar 1은 아날로그 엘피를 사랑하는 전 세계 음악 애호가들을 위해 레가가 준비한 전통적인 레시피에 따라 제작되었다. 그리고 최근엔 월넛 에디션이 출시되어 시각적으로도 뭔가 목가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우선 Planar 1은 심플하기 그지없는 디자인을 가졌다. 월넛 플린스 좌측 하단엔 on/off 스위치가 달려 있어 왼손으로 누르면 플래터가 회전하며 이후 오른손으로 톤암을 들어 듣고 싶은 곡 위에 위치시킨다. 마지막으로 톤암축 우측에 달린 리프트를 내리면 드디어 음악이 흘러나온다. 100% 수동, 벨트 드라이브 방식이고 포노앰프는 별도로 구매해야하며 블루투스 같은 기능을 꿈도 꾸지 마라. 레가는 타협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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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톤암은 RB110 톤암으로 전 세계적으로 가장 우수한 톤암을 만들 줄 아는 몇 안 되는 레가의 엔트리급 모델이다. 스태틱 방식으로 이 정도 가격대에 장착된 톤암 중엔 내가 알기론 가장 우수한 트래킹 능력을 발휘한다. 그럼에도 별도의 세팅이 필요하지 않아 초심자들도 누구나 바로 사용 가능하다. 하지만 이렇게 간단하면서도 뛰어난 성능을 내줄 수 있는 건 매우 낮은 마찰을 갖는 정밀 베어링과 오토 안티스케이팅 등 레가의 비범한 엔지니어링 능력 덕분이다. 수십 년간 쌓아온 노하우와 공력은 무시할 수 없다.

플래터를 돌리는 모터는 24V 전압으로 작동하는 동기식 AC 모터가 담당하고 있다. 저소음에 뛰어난 속도 안정성을 가진다고 레가에서 자랑스레 소개하고 있는데 실제로 사용해보면 스타트/스탑도 빠르고 과거에 비해 안정적인 속도를 자랑한다. 단, 45회전 엘피를 듣기 위해선 플래터를 걷어내고 모터 풀리에 걸린 벨트의 위치를 직접 바꿔주는 수고가 필요하다. 상위급으로 가기 전엔 모두 마찬가지다. 45RPM을 별로 즐기지 않는다면 전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한편 벨트는 EBLT 벨트로 이전 버전보다 더 향상된 성능에 기여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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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터 하단의 서브 플래터 및 모터 풀리

플래터를 드러내면 스핀들 베어링 위로 서브 플래터가 장착되어 있고 여기에 EBLT 벨트가 걸려 회전하면서 메인 플래터를 회전시키는 방식이다. 중앙 베어링 하우징은 황동 베어링을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는데 자체 응력을 제거하면서 에너지 전달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설계해 특허 출원 중이라고 한다. 여기에 플래터는 페놀 수지를 사용한다. 구형에 비해 질량을 조금 더 증가시키고 속도 안정성 향상을 위해 플라이휠 효과를 개선한 23mm 구경의 플래터다. 여기에 카트리지는 레가의 엔트리급 MM 카트리지 카본을 장착해서 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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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벨트와 EBLT 벨트 적용시 와우/플러터 비교

참고로 레가는 모델명을 그대로 놔둔 채 가끔 업그레이드된 제품으로 공급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Planar 1 같은 경우도 2021년부터 새로운 매트를 적용해 출하하고 있으며 벨트도 EBLT로 바꾸어 적용하고 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약간씩 음질을 업그레이드해주는 액세서리들이다. 다른 메이커였다면 여기 저기 광고를 하면서 수선을 떨었을테고 어쩌면 디자인까지 조금 바꾸어 아예 MKII, MKIII 등으로 출시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가에게 그런 단순 판촉, 마케팅은 없다. 그리고 레가 본사는 본래 광고를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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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팅

레가 Planar 1 턴테이블의 셋업은 거의 ‘Plug & Play’에 가깝다. 턴테이블에 엘피를 재생하는 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초심자를 위해 세팅 과정을 최대한 간결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박스에서 턴테이블을 꺼내고 톤암 뒤쪽에 무게 추를 끼워 앞에 주름이 진 곳까지 최대한 당기면 끝이다. 카트리지도 세팅되어 있으므로 포노앰프에 케이블을 연결하고 어댑터를 연결해 전원을 공급해주면 세팅이 끝이다. 안티스케이팅도 자동 방식이며 오버행, 아지무스 등 복잡한 세팅 기준을 모두 잊어도 좋다.

포노앰프는 마침 리뷰를 위해 테스트 중인 바쿤 포노앰프를 사용했다. MM으로 토글을 위치시키고 게인은 Mid 2 정도에 위치시키니 적당한 볼륨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외에 앰프는 서그덴 A21 시그니처를 매칭했고 스피커는 리바이벌 오디오의 아탈란테 3을 사용했다. 턴테이블에 비하면 조금 과분한 시스템일지 모르지만 매칭은 무척 훌륭했다.

청음

시인

레가는 어떤 모델을 들어봐도 중역대 도톰한 살집 덕분에 보컬 음악, 특히 가요에서 매력을 발산한다. 그것이 꼭 레가 카트리지만의 영향은 아니어서 다른 카트리지를 적용해도 레가만의 사운가 묻어나온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오랜만에 가요가 듣고 싶어져 시인과 촌장의 ‘숲’ 엘피를 꺼내들었다. ‘가시나무’부터 시작해 마치 하나의 곡처럼 이어지듯 ‘새벽’까지 음악을 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무대가 넓진 않지만 그 안에 음악의 핵이 꿈틀거린다. 모두 중역대의 힘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김현철

가요 엘피를 한참 더 뒤지다가 오래 전 사놓았던 김현철 엘피를 발견했다. 손때가 조금 묻었지만 요즘 재발매된 가요 엘피보다 훨씬 더 좋은 음질을 보여준다. 묵직한 중, 저역과 진한 에스프레소 같은 중, 고역 질감들이 뒤섞여 맥주 한 잔이 간절해진다. ‘횡계에서 돌아오는 저녁’에서 기존에 듣던 소리보다 더 녹진하고 풍성한 사운드를 들을 수 있었다. 특히 디지털 음원보다 중역대 에너지가 높아 아탈란테 3 스피커의 중역대를 충실하게 메워주는 효과까지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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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가 Planar 1은 전체적인 대역 밸런스가 안정적이며 절대 서두르거나 엷게 흩날리는 법이 없다. 레가의 엔트리급 모델임을 고려하면 놀랍다. 이러한 차분한 음조 위에서 중역을 중심으로 밀가루 반죽처럼 찰기가 느껴지고 표면이 부드럽다. 첨예한 디테일로 쾌감을 극대화하는 스타일과 정 반대편에 서있다. 한편 둥글둥글 마음씨 좋아 보이는 레가의 대표처럼 포근하고 부드럽다. 닐스 로프그렌의 ‘Keith don’t go’를 들어보면 음원으로 들을 때보다 훨씬 더 담백하고 차분한 톤으로 노래,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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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음악을 들어도 레가 Planar 1은 스트레스 없이 긴장을 이완시켜준다. 재즈, 팝 가리지 않는 범용적인 턴테이블이다. 예를 들어 쳇 베이커의 ‘That old feeling’ 등을 들어보면 다이내믹스는 충분히 살려주면서 적당한 디테일, 따스한 온도감과 리듬감이 오묘하게 잘 어우러져 감칠맛 나게 재생해준다. 특히 이런 음악에서도 쳇 베이커의 목소리 톤의 매력이 잘 드러나며 색소폰은 부드럽고 찰진 소릿결을 보여주었다. 자꾸만 재즈 엘피를 소환시키는 통에 원고를 쓰면서 새벽까지 음악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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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

레가 턴테이블은 이미 익숙하다. 왜냐하면 나의 리스닝 룸에서 오랫동안 레가 RP10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트리지는 Apheta 2. 모두 구형이긴 하지만 그 어느 턴테이블보다 매력적인 소리를 내주기 때문에 놓아줄 수가 없다. Planar 1은 RP10 대비 극과 극에 위치한 턴테이블이다. 구형이지만 최상위 턴테이블과 카트리지를 단 RP10이기 때문. 하지만 실제 들어보면 Planar 1은 레가라는 브랜드의 매력에서 한 뼘도 양보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성능 차이는 있지만 레가는 레가였다. 이 간단하면서도 담백한 맛의 정찬이 당신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글 : 오디오 평론가 코난

제품 사양

톤암 : RB110
카트리지 : 카본 MM
모터 : 24V 저 노이즈
플래터 : 페놀릭 수지
크기 (WxHxD) : 447 x 117 x 360 mm
무게 : 4.2 kg

제조사 : 레가 리서치 (UK)
공식 수입원 : 웅진음향 (www.wjsound.com)
공식 소비자 가격 : 620,000원

Written by 코난

코난 이장호는 하이파이 오디오를 평가하는 평론가다. <고음질 명반 가이드북 1,2>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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